고래눈이 내리다: 심해에서 바라본 인류의 마지막 풍경

김보영의 단편소설 『고래눈이 내리다』는 인간 중심 서사를 떠나 심해 생물의 시선으로 환경 파괴와 종말의 징후를 그린 독창적인 SF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원문과 함께, 번역가 소피 보우먼의 영어 번역을 바탕으로 소설의 핵심 주제와 서사적 장치를 분석하며, 우리가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질문들을 던진다.

고래눈이 내리다


심해의 시선으로 본 인간 문명: 『고래눈이 내리다』의 독특한 세계관

김보영의 단편 『고래눈이 내리다』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빛나는 그물악마 1029'라는 이름의 심해어, 일종의 심해 앵글러피시(anglerfish)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배우자를 몸에 융합한 상태이며, 일종의 기생관계 속에서 공생하고 있다. 이 세계는 그 어떤 인간 중심적 가치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심해어들만의 규칙, 감각, 그리고 생태적 삶이 존재할 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래의 죽음으로 인한 '눈 내림'에서 비롯된다. 심해에 사는 생물들에게 고래의 사체는 축복과도 같다. 수개월 동안 마을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풍요의 상징이며, 심지어 사체에 붙는 좀비 벌레들마저 먹이로 이용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다르다. 냄새가 이상하고, 질감도, 느낌도 익숙하지 않다. 주인공은 그것이 고래가 아니라는 감각을 점차 확신하게 된다. 동료들은 한 명씩 같은 말을 반복한다. “고래가 아니야.” 이 소설이 특이한 점은, 생물학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다양한 심해 생물들의 생태적 특성을 정밀하게 반영하면서도, 이들 사이에 언어적 교류, 문화적 해석, 심지어 종말론적 추론까지 허용한다는 데 있다. 일종의 상상력과 사실성 사이의 정교한 경계에서 이뤄지는 서사가 독자에게 깊은 몰입을 선사한다. 주인공은 무리 속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이번 ‘눈’이 무엇인지 해석하려 한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간헐적으로 들어왔던 기억을 소환하며, "녹지 않는 것을 배출하는 괴물", "공기를 태우는 독을 내뿜는 종족"이라는 묘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지구 환경을 해쳐왔는지 보여준다.

심해의 공동체와 인류의 종말: 서사구조의 역전과 은유

『고래눈이 내리다』는 단순히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 생존과 소멸의 윤리,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심해 생물들의 집단적 반응이다. '침묵 속에서 전등을 함께 끈다'는 장면은 마치 공동 기도이자 추모이며, 나아가 자기 희생적 연대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심해의 물고기들은 인간처럼 언어를 사용하거나, 감정의 극단을 오가진 않지만, 그들의 공동체는 결속과 배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이 속한 마을은 해저의 화산열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소식을 전하고 생존을 도모한다. 이들의 삶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순환적이며, 파괴보다 보존의 가치에 더 가깝다. 작품 속에서 ‘눈’은 상징이다. 인간 문명의 파괴적 흔적, 즉 고체 쓰레기, 미세 플라스틱, 화학물질들이 죽음처럼 내려앉지만, 그것은 이들에게 생존의 양식이 된다. 이 아이러니는 인간이 남긴 오염이 결국은 다른 생물들의 일부로 흡수되고, 그러면서도 그 생물들은 인간보다 더 고요하고 존엄하게 종말을 받아들인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세상의 끈이 끊어졌다’는 표현은 생태계의 순환이 멈췄음을, 그리고 생명망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문장을 통해 독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붕괴를 체감하게 되며,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성찰하게 된다.

김보영의 SF가 주는 경고와 가능성: 『고래눈이 내리다』를 통한 생태적 감수성의 확장

『고래눈이 내리다』는 단순한 생태적 우화를 넘어선다. 이 작품은 철저히 생물학적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문학의 상상력을 통해 깊은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운다.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버린 것들이 결국 다른 생명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쓰레기를 ‘녹지 않는 것’이라 표현하는 대사는 우리가 당연시하던 언어와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심해라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사유의 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생명, 흡수와 소멸, 연대와 기도는 사실 우리가 지상에서 배워야 할 생존 방식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편의와 효율성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며 문명을 확장해왔지만, 결국 그 끝에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였음을 되새기게 된다. 김보영의 SF는 바로 이 지점을 정조준한다. 그녀는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꾸준히 서사 속에 녹여내며,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경고를 전달한다. 『고래눈이 내리다』를 읽는 것은 단지 한 편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의 생명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는 행위다. 이러한 감각은 오늘날의 기후위기, 플라스틱 오염, 해양 생태계 붕괴 등 수많은 환경 이슈와 연결되며, 독자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이끌어낸다.

심해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목소리,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

『고래눈이 내리다』는 단지 SF 단편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할 윤리적, 생태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 그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심해 생물들의 침묵과 연대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본질을 환기시킨다. 작품은 묻는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버리며, 어떤 세계를 남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세계는 과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로 가득한가? 독자는 이 질문 앞에서 결코 외면할 수 없으며, 김보영의 날카로운 상상력은 독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고래눈이 내리다』는 우리가 ‘읽는’ 작품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세계관, 깊은 바다에서의 연대, 그리고 눈처럼 내리는 종말의 잔해 속에서도 살아가는 존재들의 슬픈 아름다움이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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